여고생들이 선생님으로 나섰다? 주말이면 외국인 노동자들의 한국어 교사로 변신하는 이들. 바로 이화외고 동아리 ‘다움’이다. 최근 제9회 서울청소년자원봉사대축제에서 서울특별시장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들의 가슴 따뜻한 수업현장을 들여다봤다.
필리핀 학생 “모래? 모레? 어떻게 써요?”김포시 양촌면에 위치한 한 성당. 이주노동자들이 미사를 마치고 예배실을 빠져나오자 여고생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어 가르쳐 드려요.” 이화외고 동아리 ‘다움’ 학생들이다. 영어로 쓴 홍보지를 나눠주며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붙잡으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7~8명의 필리핀인 학생들이 모이자 수업이 시작됐다. 교사 1명당 학생은 1~3명. 한국어 교
재를 복사한 것을 가지고 공부한다. 지문을 따라 읽기도 하고 빈칸에 단어를 넣어 보기도 하며 수업 열기는 더해만 간다. 한 학생의 질문. “모래? 모레? 어떻게 써요?”“글씨는 이렇게 쓰고요, 모래는 sand, 모레는 the day after tomorrow를 뜻해요.” 두 글자의 차이점을 꼼꼼히 짚어가며 설명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선생님이다. ‘안해요’와 ‘못해요’의 차이점, ‘~도(too)’의 용법 등으로 수업은 이어졌다. 다른 한 쪽에서는 음식 이름에 대해 배우기도 한다. “한국 음식 만들어 본 적 있냐”는 질문에 “라면”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또 다른 쪽에는 ‘가나다라’부터 배우는 학생도 있다.수업에 나오는 학생들 매주 달라져 일방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쳐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학생들로부터 따갈로그어를 한 두 마디씩 배우기도 한다. 자신들의 모국어를 여고생 선생님들이 서툰 발음으로 따라하자 필리핀인 학생들은 신기하고 재밌다는 표정이다.
지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물 흐르듯 편안한 수업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연소라(16·1년)양은“사실 처음엔 수업 준비가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말주변도 없는데다 외국인들만 있는 성당에 오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는 것. ‘나도 못하는 영어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가르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단다. 처음 보는 어른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수업에 오는 학생이 매주 달라진다는 것도 어려운 점 중 하나. 어떤 수준의 학생을 받게될지 모르기 때문에 수준별 수업을 모두 준비해야 한다. 팍팍한 생활에 예·복습은 기대할 수도 없다. 또 발음을 지나치게 미국식으로 하거나 어려운 영어 어휘로 설명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때로는 교사가 모르는 단어를 질문하기도 한다. 서로 말을 잘 못 알아듣기라도 하면 학생·교사가 서로 당황하고 미안해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만큼은 그 어느곳 못지 않다. 덩달아 여고생 교사들의 한국어 교실에 대한 애정도 차곡차곡 쌓였다. 수업 준비에도 열심이다. 각 어휘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수준에 맞는 예시를 미리 생각해 간다. 백수지(17·2년)양은 “생활에 필요하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걸 가르쳐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 쓰는 법을 가르쳐 줬더니 그 다음날 문자가 왔어요. 수업 시간에 배운 ‘크다’ ‘작다’ 표현을 활용해 필요했던 신발을 딱 맞는 사이즈로 살 수 있었다고요.고맙다는 말에 마음이 뭉클했죠.” 이럴 때 수지양은 수업에 다시 한번 의욕을 내게 된단다.
한지희(17·2년)양은 또다른 경험을 털어놨다.때로 학생들이 “이 바보야” “야, 이리 와” 등 깔보는 말이나 욕설을 따라하며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한다는 것. “어디서 배웠냐고 물으니 일터에서 많이 듣는 말이라더군요. 제가 다 부끄럽고 미안해졌어요. 그럴 땐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난처하죠.” 지희양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음식 나눠 먹고 가요 배우기도
한국어 수업 봉사를 통해 차별이 아닌 다름을 배웠다는 아이들. 이예림(16·1년)양은 “외고를 다녀도 실생활에서 영어를 쓸 일은 많지 않은데, 수업을 하면서 연습이 되는 것 같다”며“또 우리가 어린데도 친구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대해줄 때면 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희양은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잘 웃고 긍정적인 필리핀 사람들을 보면서, 작은 것에도 불만이 많던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며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다움’은 매월 마지막 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한국 가요를 가르쳐 준다. 앞으로도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고 상호 소통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예정이다. 문법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수업과 심화된 수준의 수업, 테마별 수업도 준비해 나갈 계획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를 잘 배워서 부당한 대우를 조금이라도 덜 받았으면 해요. 이왕 우리나라에 왔으니 그저 남의 나라라고 생각하기보다 애착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모두는 학생·교사 구분없이 함께 뒷정리를 하며 오래도록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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