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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1-0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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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고급인력 '출혈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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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고급인력 '출혈사태'
【뉴욕=AP/뉴시스】
최근 필리핀에서는 미래가 촉망되던 한 젊은 의사의 미국 이민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도 고급인력이 더 풍족한 삶과 교육환경을 위해 선진국으로 직업이민을 떠나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엘메르 자신토라는 화제의 주인공이 의사국가고시에서 전국 1등을 했던 수재였다는 점, 그런 그가 미국에서 비참한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격렬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국가의 자랑'이었던 그가 의사의 꿈을 접고 미국의 여간호사들 틈에서 체온을 재고 링거액을 준비하고 신입 간호사들을 교육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8400만명의 필리핀 국민들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한 필리핀 일간지의 칼럼기고가는 "자신토의 사례는 오늘날 '누가 이 땅에 남고 싶어할 것인가'라는, 필리핀 사회에 던져진 근본적인 의문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자신토에게도 떠날 만한 이유는 있었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은 훌륭한 의사라 하더라도 어차피 급여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 간호사 월급이 150~250달러, 의사 월급이 300~800달러인데 반해 미국에서 공인자격증이 있는 간호사의 월 평균 수입은 4000달러로 필리핀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의사 월급보다 5배나 많다.
의료 환경도 열악하다. 의료 업무에 치명적인 전기와 통신은 치안 불안으로 끊기기 일쑤다. 자신토가 거주했던 바실란섬에서도 아부 사야프라는 이슬람 급진주의 무장단체 때문에 이같은 일이 종종 발생했다. 자신토가 8년 전 의대에 진학하기 전 간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지역 병원에 취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부 사야프가 병원을 급습해 간호사들을 인질로 억류했다. 자신토는 이때 정부군과 무장대원이 벌인 총격전 속에서 동료들을 잃어야 했다.
자신토는 마닐라에 위치한 의대 졸업 후 의사국가고시에 응시한 결과 전국 1800여명 가운데 당당히 수석을 차지해 온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러나 결국 뱀의 머리가 되느니 용의 꼬리가 되기를 택했다.
자신토를 포함, 간호사로 거듭난 20명의 필리핀 의사들이 2005년 11월 미국 뉴욕에 도착했고 자신토는 이 가운데 7명과 함께 맨해튼에서 80㎞ 정도 떨어져 있는 스미스타운의 애벌론가든스 요양원에 배치됐다.
그러나 이상과 너무 다른 미국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절망을 안겨줬다.
취업알선업체와 요양원 운영자가 처음 두 달 동안 제공한 무료숙소는 같은 처지의 외국인 간호사들로 넘쳐났다. 주방 싱크대는 막히고 전등은 망가졌으며 뒷마당에는 쥐가 활보했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일가족이 입주하는 경우도 있어 하나 뿐인 화장실은 늘 기다려야 하거나 고장나기 일쑤였다.
외국인노동자라는 처지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억울함도 감수해야 했다. 자신토를 포함해 많은 이민 간호사들이 계약조건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으며 야근 수당이나 보험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의사가 될 수 있는 확실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토는 그래도 지금처럼 간호사로 계속 생활할 생각도 있다고 밝혔다.
필리핀 최고 수준의 의사가 이렇듯 참담한 생활을 견디면서까지 차라리 미국에서 간호사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필리핀인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전직 보건장관이었던 자임 갈베즈 탄 의사는 이런 상태로라면 정말 필리핀의 미래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는 "최근까지도 필리핀의 고급인력이 '유출'되고 있다고 걱정했지만 지금 상황은 '대출혈'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5년 동안 필리핀 의사 5만 6000명 가운데 9000여명이 간호사로 재교육을 받고 해외로 취업이민을 떠난 것으로 집계된다. 이미 지방 병원들은 의사 뿐 아니라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등이 턱없이 부족한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자신토는 "애국주의도 쌍방향이어야 한다"며 "고귀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시민 개인의 책임 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 의무가 있는 국가의 책임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필리핀 국민들은 지금 산업구조개혁에 대한 정책결정자들의 적극적인 대처를 기다리고 있다.
나경수기자 ksna@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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