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미얀마)의 카렌족 주민 마웅니(34)씨가 왼쪽 다리를 잃은 건 2년 전이다. 버마 군인들이 고향 마을을 불지르는 바람에 집을 떠나 가족과 함께 정글 속에서 야영을 할 때였다. 식량을 구하러 밀림 속을 헤매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지뢰였다. 근처엔 병원이 없었다. 그날 밤 이웃들이 그를 부축해 목숨 걸고 태국과의 국경인 강을 건넜다. 병원을 발견한 게 기적이었다.

“버마군은 주민들이 월경(越境)하는 걸 막으려고 국경 근처에 엄청나게 많은 지뢰를 묻어놨어요.” 마웅니씨는 태국 메솟에 있는 ‘메타오 클리닉’이란 병원에서 일한다. 왼쪽 다리에 의족을 한 채 그가 하는 일은 다른 이를 위한 의족을 만드는 것이다. 그가 가리킨 칠판엔 그가 만들어야 할 의족들의 제작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다.

마웅니씨처럼 많은 카렌족들이 난민이 아닌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태국 국경지대에 산다. 버마·샨·팔라웅·라후족 등 버마 내 다른 민족들도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태국에 머무른다. 태국 국경지역엔 버마 출신 인구가 태국인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이 근방의 중심도시 메솟은 인구 10만여 명 가운데 60~70%가 버마인으로, ‘리틀 버마(Little Burma)’라고 불린다.

마웅니씨가 일하는 메타오 클리닉은 버마 출신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1988년 버마를 탈출한 외과의사 신시아 마웅(여·48·카렌족)씨가 이듬해 동료 5명과 함께 문을 열었다. 불법체류자들은 태국의 의료복지 혜택에서 소외돼 있고, 태국 병원에 간다 해도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매일 아침 8시 병원 문이 열리면 각지에서 찾아온 환자 수백 명이 병원 접수창구로 몰린다.

마웅 원장은 2002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2003년엔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아시아의 영웅 30명’에 선정됐다.

마웅 원장은 “매년 우리 병원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1500~2000명은 출생 등록도 못 한다. 나 자신도 불법체류자”라며 “병원도 불법, 환자도 불법, 원장도 불법, 모든 게 불법이지만 생명을 구하려면 불법일지언정 더 많은 병원, 더 많은 의사,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육현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버마 불법체류자의 자녀가 태국 학교에 다니긴 힘들다. 다닌다 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불법체류자들이 비싼 수업료를 장만할 형편도 못 된다.

이 아이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몇몇 독지가·인권단체에서 학교를 세웠지만 모두 불법 시설들이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메솟 외곽의 한 판자촌. 그 안에 자리 잡은 초등학교 ‘BLSO 스쿨’도 그중 하나다. 가로 4m, 세로 12m의 길쭉한 단층건물. 외벽은 허리춤까지만 벽돌이고 그 위론 유리창 없는 대나무 창살이 전부다. 굵기 10㎝ 남짓한 나무 기둥 몇 개가 양철 지붕을 힘겹게 받치고 서있다.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 요란한 마룻바닥 위에 꼬마 70명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아이들은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표지가 다 떨어져나간 너덜너덜한 교과서로 공부한다. 한 학년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이 교과서는 곱게 쓰고 다시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1년에 한 권 받는 공책은 깨알 같은 글씨로, 아껴 사용해야 1년을 버틴다. 점심은 1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만 학교에서 준다. 나머지 요일엔 점심을 먹으러 집에 다녀오거나 굶는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 학년에 한 반씩 5개 학급이 있다. 교실 안엔 구획이 없어 앞에선 영어 수업, 뒤에선 버마어 수업, 옆에선 수학 수업이 동시에 진행된다. 선생님은 3명뿐이라 나머지 두 반은 바닥에 일렬로 앉아 다른 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린다.

이 학교 교사는 버마 출신 불법체류자, 학생은 버마 출신 불법이주민의 자녀, 학교 자체도 비인가 시설이다. 졸업해도 학력 인정을 못 받는다. 왜 이런 학교를 다닐까.

“학교에 안 나오면 애들은 마약을 팔거나 몸을 팔게 되니까요.” 교사 윈윈민(여·35)씨의 설명이다.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마약 밀거래나 성매매에 손대는 불법 체류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런 범죄는 연령대를 가리지 않는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이런 범죄로부터 지켜내기가 더욱 힘들다.

“버마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이 마약과 섹스에 멍들게 놔둘 순 없어요. 버마의 문화와 말을 가르치는 건 기본입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을 길러내는 게 우리의 사명이죠.”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더니 대답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의사 아니면 선생님. 영어가 가장 재미있다는 3학년 여자 아이 난 아예 묘 윈(7)의 꿈 역시 의사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어른들 말씀이) 의사가 없어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대요.”

이 아이가 의사가 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 그러나 불법 학교에서 공부한 불법체류 학생이 태국 대학에 진학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불법 체류자들 사이에선 “대학 진학을 꿈꾸느니 차라리 버마에 민주화가 찾아오길 기대하는 게 더 현실적”이란 말까지 나돈다.

샤포(여·19·카렌족)는 이 말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난민 출신에 고아로 자랐는데도 외국 유학을 앞두고 있다. 샤포의 아버지는 버마군에게 살해당했다. 혼자 버마를 탈출해 멜라 난민 캠프에서 샤포를 낳은 어머니도 샤포가 11세 때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뒤 샤포에겐 배움의 기회가 찾아왔다. 멜라 캠프를 몰래 빠져나와 2001년 메솟에 있는 ‘고아를 위한 기숙학교(BM SOH)’에 입학한 것. BMSOH는 외국 NGO(비정부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졸업생을 외국대학에 유학 보내주는 장학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이 학교 우등 졸업생인 샤포는 “몇 가지 심사와 인터뷰만 거치면 캐나다의 대학으로 유학갈 수 있다”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샤포의 장래희망은 유학을 마친 뒤 BM SOH로 돌아와 교편을 잡는 것이다. 밤에는 기숙사로 변하는 교실에서 여러 학년이 뒤엉켜 공부하는 학교, 교과서도 교사용 1권밖에 없어 전교생이 복사해서 써야 하는 학교지만, 이곳에 돌아와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키워드>

미얀마와 버마
버마 군사정권이 1989년 일방적으로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지만,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진영은 계속 ‘버마’를 고집한다. 유럽국가들은 ‘버마/미얀마’ 식으로 병기(倂記)하지만, 미국·영국·호주 정부는 ‘버마’를 공식 국명으로 쓴다.

카렌족
카렌족은 버마(미얀마)의 소수민족. 1949년 버마가 독립하자, 자치를 요구하며 내전에 돌입했다. 버마 군사정권인 SPDC(국가평화발전평의회)는 2005년 남부 해안도시 양곤에서 카렌족들이 많이 사는 산악도시 피인마나로 수도를 옮겼고, 카렌족의 땅을 빼앗거나 마을을 불태우는 한편, 이들을 신(新)수도와 군부대 건설을 위한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이 같은 탄압을 피해 카렌족 수십만명이 집을 떠나 정글 속에서 살거나 태국으로 도망쳤다. 카렌족 상당수는 태국 불법 체류자가 됐고 일부는 난민촌을 형성했다. 현재 태국 군대가 통제하는 난민 캠프는 버마 국경을 따라 9개, 수용된 난민은 15만명이다.

■ 이들을 도우려면…
버마 군사정권을 피해 태국으로 피란 온 카렌족 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아이들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교육시설이 없습니다. 난민촌을 벗어나도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취업이 힘듭니다. 난민촌에 앉아 UN 등 국제구호단체들이 지급하는 옷과 음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미래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난민촌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옷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들을 돕고 싶은 분은 태국 현지로 찾아가시면 됩니다.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를 방문하거나 전화를 거시면 손쉽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의전화: 02-6717-4000

인터넷: www.goodneighbors.org

▲ [특집4부작]Our Asia -4편 '타향 - 카렌족 난민 이야기'

[메솟(태국)=이용수기자 hejsu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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