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군부는 1997년 합법 총선에서 승리한 민간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군사적인 지배를 계속하고 있다. 사진은 존 부어만 감독이 1988년 네윈 군사정권에 맞선 버마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제작한 ‘비욘드 랭군’의 한 장면.

－‘우물안 인권’갈 길 멀다－

인권의 발전은 민주주의 실현과 정비례의 상관성을 갖는다. 국가라는 열차에서 인권은 발전의 엔진이고 민주주의는 쇠바퀴이며 그 구성원은 승객이자 승무원이다. 그리고 국가는 역사의 단선 궤도를 달린다. 국가의 민주화와 인권은 일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발전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간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 일부 국가의 수장과 학자들이 주장했던 아시아적 가치라든지 공동체적 민주주의라는 담론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있다.

인권 문제와 그 해결은 지구화된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동아시아의 인권은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라는 완고한 봉건성과 선 경제발전이라는 각국의 배타적인 경계를 넘어선다. 국제사회가 세계인권선언을 약속하고 인류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 목표임을 재확인한 1993년 빈선언이 유효하게 적용되는 현대의 민주적이고 인권적인 세계시간에 비춰보아야 할 문제이다.

지리적인 개념으로 보면 동아시아는 경제 성장, 고전적인 경제 관계, 신자유주의가 관통한다. 이는 곧 현재의 집권 엘리트와 경제적 지배집단의 질서를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역내 주요 기업과 정부가 말하는 한·중·일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동아시아가 갖고 있는 지리적이고 전통적인 연고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인권은 역사적 발전단계로 보면 아직 봉건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지배질서 속에 있다. 이런 구조를 갖고 있는 역내 국가들에서 인권의 발전이라는 맥락에서의 규범적이고 탈권위적인 민주주의 질서는 비주류적인 하나의 과제이거나 체제 저항적인 집단, 즉 일부의 운동과제로만 한정된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인권을 얘기할 때는 인권 자체가 갖고 있는 역동성, 구체제 타파적인 속성과 국민 특히 시민사회 형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인권문제는 여전히 국제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치경제적으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아프리카 지역에서 지역 인권헌장을 합의하고 이른바 민족자결권 등 아프리카적인 가치와 이익을 평화와 발전에 대한 집단적인 권리로 접목하여 발전시켜왔음을 상기할 때 동아시아 지역의 인권 발전은 매우 더디고 어떤 면에서 반동적인 성격이 있다. 동아시아가 세계 인권 발전의 시간 속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의 인권은 세 가지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인권의 미지 또는 암흑인 상태, 둘째는 형식적으로 인권 레짐을 형성해 나가는 상태, 셋째로는 국제적인 인권기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태이다. 인권이 암흑인 상태는 미얀마(버마)와 같이 군사독재와 통제가 계속되는 사회다. 이런 상태에서는 외부에서 인권상황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접근 자체가 거부되어 총체적인 인권 유린을 제어할 수 없다. 세계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가거나 멈춘 곳이다. 두 번째 상태는 경제발전으로 인권 문제를 무마하거나 한정된 영역에서 국가의 인권보호 의무가 형식적인 제도로 이행되고 있는 곳이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 국가는 알리바이 인권기구가 있지만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국가들은 인권 문제를 국가주권의 문제로 다루려 하거나 제국주의 문제 즉 아시아와 서구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규정한다. 인권침해 논란 자체를 거부하고 독재적인 체제를 공고히 한다. 이는 과도한 국가동원적인 체제로 인해 시민사회의 형성이 지체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 번째는 국제적인 인권기준을 지켜나가는 것은 분명하나 국내에서 인권이 국가운영 목표로 완전히 설정되지는 않은 상태로 한국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화는 인권을 국민국가적인 시각에서 일국적인 문제로 간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상시적이고 조직적으로 명백한 인권침해가 지속되어도 경제와의 분리 정책에 의해 독재 권력을 지탱해 주고 반인권적인 국가관행을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자행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중대한 인권침해 가해자에 대한 불처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사형제도 폐지와 관련된 선택의정서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면 동아시아는 인권분야의 세계시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동아시아는 바로 지역 공간과 경제 그리고 안보의 동아시아에 머물러 있으며 인권보장을 위한 창조적인 체제는 구축되어 있지 않다.

동아시아의 인권 발전을 말하려면 개별 국가들의 인권이라는 측면보다 동아시아의 인권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동아시아의 범위에서 인권문제는 바로 ‘오늘’의 국제기준과 관련된다.

예컨대 그동안 정부 간 무역과 경제 교섭에서 역내의 인권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이는 국제적으로 아시아를 인권 후진국가군으로 인식시켜 온 요인이다. 이제 동아시아의 경제관계에서도 노동 조건 등 인권 문제가 부각되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은 불가피한데, 한국도 동아시아 국가 출신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다수 들어오면서 국내의 인권보호 조치와 동일한 수준을 요구받고 있다. 단순히 노동력의 국제 분업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나 노동력의 이동이 촉진되고 문화적인 접변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역의 안보문제를 갖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보면 동아시아의 인권보장은 곧 동아시아의 평화를 의미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역내 발전과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 인권 정책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다. 각종 무역관계를 논의할 때 노동자의 노동조건이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서도 교섭해야 한다. 이른바 사회조항들에 대한 교섭 그 자체가 동아시아의 틀에서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또 국가 간 인권 대화이다. 예를 들어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와 이슬람교도가 많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와 같은 나라와의 양자간 또는 다자간 인권 대화 자체가 의미가 있다. 이런 국가간 인권 대화의 과정에서 이른바 북한의 인권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를 말할 때는 중국의 안보 정책, 일본의 경제 정책과 더불어 한국의 인권 정책이 논의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은 과도기적으로 중요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유엔의 틀 또는 아·태지역이라는 광범한 지역을 국제적인 협력 관계로 설정하기보다 동아시아 중시 정책을 세워야 한다.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전제조건은 동일한 준칙을 형성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권 이외에 없다. 동아시아의 인권헌장 채택과 동아시아 인권위원회와 인권재판소 설치는 인권운동계나 정부 모두의 과제이다.

〈이창수|새사회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