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작성일 : 06-12-18 09:58
|
‘바보’ 만들어내는 나라
|
 |
 조회 : 1,677
|
‘바보’ 만들어내는 나라
[경향신문 2006-12-17 21:03]
몇 년 전 미국에서였다. 아는 사람이 전화를 해 왔다. 아들이 유치원에 안 간다며 떼를 쓴다는 것이다. 유치원에 알아보니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됐다.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 부설 유치원에서 미국 아이들로부터 매일 ‘바보’라고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미국 아이들 ‘눈금’으로는 여섯살이 되도록 영어를 못하니 바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간단한 인사말도 못 알아듣고 엉뚱한 행동을 하니 말이다. 완전한 왕따였다. 유치원측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했다. 같은 반에 교포 자녀도 있었지만 미국 아이들과 똑같이 한글을 모르니 아이의 적응에 도움이 되긴 힘들었다.
세살 때 한글을 깨우쳐 ‘천재’로 소문났던 아이였으니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의 천재가 연수 간 아빠를 따라 미국에 갔다가 그만 바보로 전락한 것이다. 이 아이가 미국에서 ‘보통 아이’가 되기까지는 석 달이 넘게 걸렸다. 아이는 미국 생활 8개월이 넘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유치원측은 아이의 어휘력이 미국 아이들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겪었을 아이의 심적 고통을 생각하니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래도 운이 좋은 경우다. 마음 고생은 했지만 영어를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년 뒤엔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도 잘 하는 천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다문화가정 자녀 부적응 심각－
한국에도 ‘바보’란 별명을 가진 아이가 많다. 최유선(가명)이라는 초등 1년생 여자 아이의 경우를 보자. 유선이는 베트남어로 된 이름을 또 하나 갖고 있다. 이쯤 되면 다들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 유선이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의 딸이다. 피부는 가무잡잡해도 오뚝 선 콧날과 맑은 눈망울이 예쁜 아이지만 별명은 바보다.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어색할 때가 많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엄마, 딸에게 한국말 가르치기 힘들 만큼 바쁜 아빠 때문이다.
유선이의 학교 친구들은 유선이가 왜 한국말을 잘 못하는지 잘 모른다. 어렴풋이 이유를 아는 아이들도 유선이를 놀리고 가끔 머리채를 잡는다. 유선이는 꿋꿋이 학교에 다닌다. 부모 입장에서야 안타깝고 화가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것이란 믿음이 있다. 하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던 또 다른 ‘베트남 엄마’ 자녀는 견디지 못하고 진작 학교를 그만뒀다. 그 아이는 집에서 논다.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다. 국제결혼과 이주노동자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어서다. 이주노동자만 50만명을 넘는다. 국제결혼 비율은 13%를 상회한다. 특히 농어촌 지역 거주자들의 결혼은 36%가 외국인을 상대로 이뤄진다고 한다. 3쌍 가운데 1쌍꼴이다. 2020년이 되면 국내 혼혈인 수가 1백70만명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들의 자녀 교육에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야 하는 충분하고도 시급한 이유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외국인 어머니가 말을 잘 못해서다. 자연히 학습능력이 오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별로 없다. 이들을 교육시키는 일부 시민단체나 종교단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문화 가정 자녀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문제는 이들이 한국에서 1, 2년 살고 돌아갈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사회 부적응자가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따돌림과 배척 등 성장과정에서의 문제로 반사회주의적 성향을 띨 수도 있다. 국가적 과제인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소수자들의 교육과 삶에 정부와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민주국가의 기본 책무이기도 하다.
－교육장치 마련 국가 나서야－
한 시민단체가 ‘다문화 가정’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를 설립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정원 50명 규모로 내후년에 문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일반 학교와 별도로 설립해 운영하는 것이 국가발전과 사회통합 측면에서 생산적인 일인지 정밀하게 따져 볼 일이다. 한편으론 시민단체가 이렇게 나설 때까지 정부는 뭘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
|
Total 6,589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