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차이 뛰어넘은 배려 그녀를 '우리'가 되게 합니다

오전 6시30분. 아직 어둠이 짙게 드러워져 있다. 겨울 추위 탓인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부엌으로 향하는 엘리자베스(31·여·필리핀)씨는 "오늘도 늦었구나" 되뇌며 조심스레 부엌에 들어섰다. 시어머니 이정자(63)씨가 벌써 아침식사를 준비 중이다. "더 자지 왜 나왔어" 웃음 띤 시어머니 말에 그녀는 멋쩍어하며 식사 준비를 도우려 팔을 걷어 부쳤다.

1년 6개월전 엘리자베스 씨가 경남 김해시 진영읍의 작은 고물상에 시집온 이후 아침을 직접 한 것은 열손가락 안에 든다. 시어머니의 배려다. 시집온 지 6개월 간은 아침 식사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 걸레를 잡고 집안 구석 구석을 닦았다. 하지만 그녀는 요즘 김치찌개며 콩나물국 등 웬만한 한국 음식은 곧잘 만든다.

등교하는 그녀의 큰 아들(11·초교 3년)이 제일 먼저 밥상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씨는 시집와서 줄곧 큰 아이의 밥은 직접 차린다. 남편 문인규(43)씨의 전처 자식인 큰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를 너무 잘 따른다"는 남편은 그녀가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더욱 친해졌다고 흡족해했다.

큰 아이가 등교하자 시아버지 문경식(70)씨와 시어머니,남편,엘리자베스 씨,그리고 엘리자베스와 남편 사이의 딸(1) 등 5식구가 밥상에 앉았다. 기자도 엉겹결에 끼었다. 엘리자베스 씨는 된장찌개에 제일 먼저 손이 갔다. 이어 김치,콩나물 부침. 음식먹는 것만 보면 영락없는 한국사람이었다. 문화의 차이가 조금씩 극복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이웃 주민 배모(53·여)씨가 아침부터 놀러왔다. "이 집에 복덩이가 들어왔어요. 인사성 밝지,일 잘하지". 배씨는 칭찬 일색이었다. 시어머니는 "스스로 알아서 잘하니까 나무랄 것이 없다. 이제 껏 화내거나 인상쓰는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고물상 일이 바쁠때 망설임없이 일을 도왔다. 임신을 했을 때도 그랬다.

식사를 마치자 남편이 밥상을 들고 나갔다.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오가는 것은 남편 몫이다. 자상했다. 남편은 그녀가 시집올 당시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영어사전을 옆에 끼고 살 정도였다.

오전 9시30분 엘리자베스 씨는 외출준비를 했다. 김해여성복지회관에서 열리는 이주여성문화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그녀는 일주일에 5차례 김해시청과 여성복지회관을 오가며 하루 2시간씩 한국어를 배운다. 벌써 8개월째다. 시어머니는 손녀를 업고 잘 다녀오라고 배웅까지 한다. 전폭적인 지지다.

엘리자베스 씨는 복지회관에 갈 때면 즐겁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같은 나라 출신의 제시카(28·여·김해시 삼계동) 씨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5년전 어학연수 온 남편(29)과 필리핀 현지에서 결혼해 3년전 한국에 온 제시카 씨는 시부모와 남편,시숙,그리고 두아이 등 일곱 식구가 살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 시부모의 배려 속에 한국어 공부를 열심한 덕에 김해시 외동의 아동센터에서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원어민 강사를 하고 있다. 일주일에 2번 4시간 강의에 한달 평균 200만원 가량의 월급도 받고 있다. 소외받고 멸시받는 이주여성이 아닌 당당한 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한국생활이 처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자상한 남편,배려깊은 시부모들이 있었지만 언어소통과 문화차이는 어쩔 수 없어 눈물을 훔친 게 부지기수였다. 대부분 결혼이주여성들이 언어소통과 문화적 차이로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남도와 창원여성의 전화 부설 이주여성센터에 따르면 2006년 4월 현재 경남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수는 1천732명. 이 가운데 50%인 866명이 '언어소통이 가장 어렵다'고 응답했으며 25%인 433명이 '한국문화를 이해하기 힘들다'며 문화적 차이를 호소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제시카처럼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생활하려는 사람들이 지난해부터 부쩍 늘고 있다는 게 김해여성복지회관 관계자의 말이다.

한국어 수업을 끝낸 엘리자베스 씨는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는 시어머니가 차렸지만 저녁을 직접 하기 위해서다. 시어머니도 6개월전부터 저녁 식사는 며느리가 손수 해주는 밥을 먹고 있다. 설겆이를 마치고 온 가족이 TV앞에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은 한국의 여느 가정과 다름없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 씨는 새해에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제시카처럼 어엿한 원어민 강사가 되는 소망을 간직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김진성기자 paperk@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