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이어지는 영화상 시상식에 ‘외국인 배우상’이라도 신설해야겠다. 최근 한국영화에 출연하는 외국인 배우들이 많아졌다. 단역이 아니라 엄연한 주ㆍ조연급 캐릭터들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국영화에 외국 배우들이 출연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다국적 합작영화에서 국내 스타들과 호흡을 맞춘 해외의 전문 배우거나 스타들이었다. 반면 최근 한국영화에 출연한 외국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한국을 찾아 거주중인 비전문 배우출신들로 한국에서 영화 데뷔의 꿈을 이룬 경우다. 국적도 다양한 이들은 취업이나 공부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가 영화에 출연했다. 한국어 실력도 외국인으로선 매우 뛰어나 ‘초능력자’에선 엄연한 조연을 맡은데다 심지어 충청도 사투리를 능청스럽게 구사하거나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스러운 맛깔나는 구어체 대사를 보여준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으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16만9981명이다.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다문화 시대’에 대해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엔 독립영화에서 동남ㆍ서남아출신 이주노동자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했으며 올해에는 드디어 ‘의형제’ ‘초능력자’ ‘방가? 방가!’ 등 주류 흥행작에서 주한 외국인들이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배척받고 핍박받는 ‘타자’(他者)에서 ‘동반자’로 묘사된 것도 변화다.
▶국적, 직업도 다양한 외국인 배우들
강동원과 고수가 주연한 ‘초능력자’에선 두 명의 외국인 배우가 극중 톡톡한 감초조연 역할을 해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터키출신의 에네스 카야(27)와 가나출신의 아부다드(25)다. 이들은 악행을 거듭하는 초능력자 강동원에 맞선 고수의 조력자로 출연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대단한 활약을 보여준다. 아부다드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에네스 카야는 자연스러운 한국어 솜씨로 고수를 “형”이라고 부르며 대사를 구사한다. 에네스 카야는 한국 거주 8년째로 고교 졸업 후 유학차 한국을 찾아 한양대를 졸업했으며 한국 회사에 취업해 몇 개월 근무하다가 프로축구팀 서울FC의 전 감독인 귀네슈의 통역으로 1년간 일하기도 했다. TV 예능프로에도 드문 드문 출연했다. 아부다드는 고국에서 과학을 전공한 뒤 심장의학을 공부하고자 한국행을 선택했다.
‘방가? 방가!’에선 방글라데시출신 칸 모하마드 아사두즈만과 우즈베키스탄 에숀쿠로브 팔비스, 미국의 피터 홀맨 등 외국인배우 트리오가 주인공의 공장 동료 노동자로 출연한다. 이중 칸은 실제로 15년째 한국에 체류하면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전국노래자랑’에서 외국인 최초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 끼많은 보통사람이다. 미국출신이지만 네팔 노동자로 등장하는 피터 홀맨은 한국에서 배우의 꿈을 이뤄가고 있는 연예인. 지난해 영화 ‘반두비’에서 백진희와 주연을 맡았고 공익광고에도 등장한 방글라데시 출신 마붑 알엄 무스타크 아메드는 취업차 한국을 찾아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에 눈을 떠 다큐멘터리 연출가, 이주노동자영화제의 집행위원장, 번역가, 미디어활동가.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독립영화에서 메이저 영화로, 타자에서 동반자로
‘초능력자’에선 학력도 직업도 별볼일 없는 한국인 청년이 외국인 이주 노동자 동료와 함께 힘을 모은다. ‘방가?방가!’는 아예 부탄출신 이주노동자로 위장한 한 청년의 취업기를 다룬 작품. 결국 이 영화에서 이주노동자의 처지는 한국인 청년들이 맞딱뜨린 현실과 다르지 않다. ‘타자’이기 이전에 ‘사회적 약자’이며 그래서 ‘같이 살아야 할 동반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의형제’에선 해고당한 국정원 직원과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남파 고정간첩이 동거한다. 이들이 처음 하는 일은 남편을 떠나 가출한 동남, 서남아 출신 외국인 여성을 찾아주는 해결사 업무였지만 결국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이주 여성들에 공감한다.
한국영화에서 외국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지난해 개봉했던 일련의 독립영화였다. ‘반두비’에서 임금을 떼이고 사장을 찾아다니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은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다른 이방인들에게 불친절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봤다. 유준상이 주연한 ‘로니를 찾아서’에선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이유없이 눈을 부라리거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린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서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베트남 청년이 유일하게 구사할 줄 아는 문장은 “나도 인간입니다. 때리지 마세요”였다.
외국인 100만명 시대. 다문화 시대의 한국영화는 ‘타자’에 대한 배척을 넘어 행복한 동행과 연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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