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합,바지락,파래 사요(싸요). 각지는 말고,덤 마니 주께(깎지는 말고,덤 많이 줄께요).”

검은 피부의 외국인 노동자 알리(32)씨는 평일에는 경기도 안산 시화공단에서 화장품 케이스 만드는 일을 하지만 주말이면 안산역앞 수퍼의 해산물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나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고객이지만 한국인 아줌마 단골도 적지 않다. 하얀색 방수 앞치마를 차려 입은 알리씨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얼굴에다 특유의 애교로 흥정에서 밀리는 법이 없다.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건너와 10년 넘게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알리씨는 방글라데시 출신이지만 한국인이나 다름없다. ‘ㄲ’과 ‘ㅆ’ 등 쌍자음이 들어간 된소리를 제외하면 발음도 비교적 정확하고 한국의 음식문화에도 익숙한 편이다. 방글라데시에서 홍합 등 조개류는 껍질을 돌로깨서 오리와 닭에게 먹이는 사료다. 알리씨는 “한국에 처음와서 된장국에 들어가 있는 조개를 보고는 질겁을 했던 적이 있지만 3개월 넘게 해산물을 팔다보니 이제는 마니아라고 불릴만큼 조개류를 즐겨 먹게 됐다”고 말했다.

안산역 주변 상가에는 알리씨와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시간당 5000원의 임금을 받고 일일판매에 나서고 있다. 외국어에 서투른 상점 주인 입장에서는 언어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다 종업원과 동향인 이들이 매상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알리씨가 일하는 수퍼를 지나 몇 걸음을 걷다보니 맛있는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나는 숯불구이 좌판이 보인다.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으면서 기름을 쪼옥 뺀 그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싸이꼼’이라는 이름의 태국식 순대에 끌린 행인들은 발길을 멈췄고 주인은 연신 나무젓가락에 끼워 건넨다.

한국에 온지 3년이 넘었다는 쑤꼼(30)씨는 여자친구와 함께 고향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숯불좌판 옆에 주차돼 있는 1t트럭에는 태국식 국수가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중국 요녕성 출신의 최룡송(42)씨가 군고구마 노점을 하고 있다. 드럼통을 잘라 만든 군고구마 구이통에는 한글과 중국어로 ‘군고구마’라고 씌여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최씨가 노점을 연 것은 3주전부터. 최씨의 노점를 이용하는 고객중 한국인은 10명중 4명에 불과하고 외국인의 비율이 더 많다.

불경기로 고통을 받고 있는 여느 중소도시와는 달리 안산시는 활기가 돌았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왕래가 잦은 안산역 주변 상가는 물론 인근 원곡동까지 장을 보러 나온 한국 주부와 외국인들로 넘쳐났다.

이들 지역에서는 하루 매출의 70∼80%가 외국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산시가 적극적인 외국인 포용정책만이 침체된 반월·시화 공단을 살릴수 있다며 외국인근로자의 복지와 인권문제 개선에 적극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안산시는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외국인복지지원과를 설치,복지회관을 건립하고 고충상담과 문화행사,응급구호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역사회 적응을 위해 외국인근로자와 결혼이민자들에 대해 한글교육을 하는 것은 물론 산재로 고통받고 있는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

안산시에는 지난 6월 현재 2만559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해 국내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최대 외국인 거주 밀집지역으로 꼽힌다. 이들 외국인노동자들은 대부분 반월과 시화공단의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면서 지역 경제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안산시는 앞으로 원곡동 일대를 ‘국경 없는 거리’로 만들어 내년부터 다문화 공동체의 테마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외국인들의 생활환경에 맞게 다양한 국가의 상징성을 살린 조형물을 설치하고 세계 각국의 문화와 역사,볼거리가 가득한 거리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같은 정책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온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시민의식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안산외국인이주민센터(센터장 박천응 목사)가 경기개발연구원과 공동으로 총 2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다문화 공동체 형성을 위한 의식조사’에서 경기도민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매우 좋게 생각한다(6.7%),‘좋게 생각한다(57.5%)’로 답해 긍정적인 대답이 64.2%를 넘었다. ‘보통이다(29.2%)’는 응답을 제외한 부정적인 답변은 6.6%에 불과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5년 이상 장기체류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질문에 대해서도 찬성한다는 의견이 41.9%로 반대의견(19.5%)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박천응 목사는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정착을 원천 봉쇄하는 정책은 최선이 아니다”며 “장기 체류자들을 껴안을 수 있는 다문화 공동체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황일송 문수정 기자 ils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