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들이 몰려 사는 구로 가리봉동과 대림동 일대에는 중국어 간판을 한 가게들이 많다. /김문석기자

전철 7호선 남구로역, 1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 서울 구로구 가리봉1동 가리봉시장 입구. 굴뚝산업의 대명사였던 구로공단이 첨단 디지털산업단지로 리모델링되면서 구로구 전체가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시장입구 분위기는 70~80년대의 시골장터 그대로다.

이곳이 바로 조선족 거리인 옌볜촌이다. 2일 오전 10시. 곳곳에 중국어 간판이라도 없었다면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국내 최대의 ‘조선족 타운’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한자 간판을 단 가게들은 대부분 조선족이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에 한 식품점에 들러 ‘조선족이 맞느냐’며 요즘 경기를 물었다. 10여곳 가게 점원들은 한결같이 “조선족이 아니고 한족이 운영하는데 어디서 왔느냐”며 “사장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는 식의 퉁명스러운 답변만 돌아왔다. 결국 가리봉1동 사무소 이재성씨의 안내로 ‘조선족타운’ 동포들의 삶을 들여다 봤다.

조선족으로 중국식 식당인 ○○반을 운영하는 박동승씨(30)는 “여기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출입국사무소 직원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돈을 뜯긴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라며 “국적을 취득하거나 귀화해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신분을 물어 볼 경우에는 입을 닫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고 털어놨다.

시장은 오후 6시가 돼서야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식당, 노래방, 다방, 중국식 마사지 등에 네온등이 켜지고 일을 마친 시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재성씨는 “조선족들의 경우 주민등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인 거주 인원을 알 수는 없다. 가리봉1동에 등록된 조선족은 2000여명으로 추정되지만 하루 유동 인구는 아마도 1만여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전철역이 가깝고 집값이 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국동포들이 이곳에서 한국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된다”고 소개했다.

식당에서 만난 또다른 조선족 김은철씨(48)는 “중국에서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월급이 10만원 안팎인데 비해 한국에서는 2백만원 정도를 벌고 있다”며 “입국 수속을 위해 빚을 내 8백만원의 거금을 대행사에 수속비 명목으로 내고 한국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주방을 겸한 단칸방 월세 15만원과 생활비를 빼더라도 중국에서의 1년치 월급을 한국에서는 한 달에 벌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김씨는 “입국후 1년 동안은 오야지(사장)한테 월급을 고스란히 떼이고 몸까지 혹사당한 까닭에 병원신세까지 지면서 분노가 치밀었던 때도 있었다”며 “2년전부터 좋은 사장님을 만나 빚도 갚도 집사람까지 입국해 식당에 나가서 돈을 벌기 때문에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선족타운’에 둥지를 튼 남자들은 현장 노동자로, 여자들은 식당에서 날품을 판다.

구로공단의 ‘쪽방’이 이제는 조선족들의 생활터전으로 주인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한국은 ‘코리안 드림’이 있는 희망의 땅만은 아니다. 노래방에서 만난 조선족 이은정씨(38)는 “10명 가운데 9명은 임금체불 경험이 있는데다, 10명 중 3명은 도박, 불륜 등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난다”며 “한국에서 돈을 벌기는커녕 몸 버리고 가정까지 망가진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전했다.

이씨는 “월급도 못받고 식당에서 쫓겨난 뒤 너무 외로워서 한국에 온 조선족 남자와 살고 있다”며 “주위에 식당일을 그만두고 몸을 파는 조선족도 있다”고 귀띔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다 숨진 사람들도 많다. 중국 전화방을 운영하는 김영선씨(48)는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1년 동안 중국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3~4개월 연락이 끊겨 알아보면 병에 시달리다가 죽은 경우도 많다”며 “한국 물가가 너무 비싸고 한국사람들이 동포라고 따뜻하게 대해 주기보다는 무시하거나 차별적인 대우가 너무나 많아 하루빨리 돈을 벌어 중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토로했다.

요즘 구로동 옌볜촌 조선족들은 뉴타운 개발 소식에 좌불안석이다.

8년째 식당을 하고 있는 박춘식씨(60)는 “구로구의 도시정비계획이 발표됐다는데 사실이냐”며 “상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집세가 저렴해 제2의 조선족 타운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대입구역 근처로 가게를 옮길 계획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