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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난민들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내전과 정치적 박해, 차별로 얼룩졌던 본국의 삶에 비해서도 간단치 않다. 난민들은 대부분 생계 유지를 위해 다른 외국인 노동자처럼 제조업 공장에서 일한다. 소수지만 대학을 다니는 난민도 있고, 정치활동을 하는 모임도 있다. 무엇을 하든 경제적으로 어렵긴 매한가지다.
◇공장일로 생계 유지=미얀마 출신 난민 앤드류(47·필명)씨는 휴일인 지난 1일에도 오후 11시까지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는 한 의류공장에서 일했다. 미얀마 최고 대학인 랑군대 출신으로 고향에서 유명한 변호사였고 훗날 ‘국회의원감’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주6일 하루 12시간씩 일해 그가 받는 월급은 90만원. 일한 시간에 비해 턱없이 작은 액수지만 그나마 이런 직장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 2003년10월 입국한 뒤 일이 없을 때가 많아 10차례 이상 회사를 옮겨다녔다. 현재 다니는 곳에선 2개월 전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는 “더 좋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나이가 많은 편인데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에게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난민들은 특출난 능력이 있어도 중소규모 공장 외 다른 곳에 취직하기 힘들다. 피부색과 출신국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불법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데다 말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출신 난민 니킬 프리어 차크마(31)씨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 전화를 엄청 많이 했는데 받아주지 않았다”며 “직업교육을 받아 삼성전자 같은 기업에서 전기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6개월 전 실직했다 현재 경기도 김포시에서 용접일을 하고 있다.
일자리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얀마 출신 난민 칭 칸 싱(43·여)씨는 취직이 안돼 고민이다. 지난해 전남 목포에 아기 돌보는 일이 생겼지만 목포가 서울에서 4시간 이상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만뒀다. 한국어를 배우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월 20만원짜리 어학원 강의를 수강했지만 너무 어렵게 가르쳐 포기했다.
◇학업 잇는 난민도=상당수 난민이 학력수준이 높고 배우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미얀마 민주화운동모임인 ‘버마 NLD 한국지부’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내 툰 나잉(38)씨는 이번 봄학기부터 성공회대 NGO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측이 장학금 혜택을 줘 등록금은 면제받고 생활비로 월 70만원을 받는다. 그는 “한국이 어떻게 민주화됐는지를 공부해 뒷날 조국 민주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 이슬람 국가 출신 난민은 본국에 돌아가 선교를 할 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 그는 지난 2년간 낮에는 공장일을 하고 밤에는 강의를 들었다. 본국에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탄압받은 미얀마 출신 리디아 다징(42·여)씨는 2004년 국내 한 신학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번 달부터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드물지만 자신의 전공과 특기를 살린 사례도 있다. 아프리카 출신 한 난민은 서울 모 대학 프랑스어학과 전임강사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차 입국했다 난민신청을 한 브룬디 난민 버진고 도나티엔(29)씨는 모 기업에 취직, 일과 아마추어 마라톤 선수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난민들이 생계 유지에만 전념하는 건 아니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고국으로 못 돌아가는만큼 한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는 난민도 많다. 미얀마 난민 중 일부는 ‘버마 NLD 한국지부’를 통해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화요일 서울 미얀마대사관 또는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주변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촉구하는 ‘프리 버마’ 캠페인을 벌인다.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교회에 머물며 전도활동을 하는 난민도 있다.
◇한국 등지고 떠나기도=NLD 부회장인 마웅 르윈(42)씨는 말기신부전증으로 투병중이다. 매주 3차례 신장투석을 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치료비는 다행히 의료보호 혜택을 받지만 생활비는 NLD 회원들이 모아준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하루 빨리 신장이식을 받아 일을 하고, 민주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며 “한국의 지인들이 곧 도와줄 것이란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난민 인정을 받은 뒤 해외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외부와 접촉을 피하는 난민도 있다. 난민으로 국내에서 살아가는 게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미얀마 난민 1명은 미국 영주권을 받아 지난해 아내와 함께 떠났다. 주위 동료들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보고 있다. 200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난민 인정을 받은 에티오피아인 목사는 2004년 이탈리아로 출국해 아직 입국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그가 부인의 병간호를 위해 출국하고 싶다며 여행증명서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대학 전임강사인 아프리카 난민은 ‘한국에서 한번도 취재에 응한 적이 없다’며 동료 교수를 통해 인터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난민 신청과 소송을 돕는 시민단체 ‘피난처’ 이호택 간사는 “대부분 험난한 삶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자기 보호벽이 단단하고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놀라는게 난민들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난민이란= 난민(Refugees)이란 '인종·종교·국적·특정사회집단 소속 또는 정치적 견해 등으로 박해받을 것이라는 충분히 이유있는 공포 때문에 자국 밖에 있거나, 자국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그러한 공포 때문에 자국 보호를 원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1992년 12월에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과 난민의정서(두 가지를 합해 국제난민조약)에 가입했으며, 1994년 출입국관리법에 난민관련 규정을 신설했다. 국제조약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협약난민이라고도 한다. 2001년 2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 국적인 데구 다다세 데레세씨에 대해 난민지위를 인정했다. 난민조약에 난민자격 인정을 위한 강제 규정은 없다. 따라서 난민 인정은 국가주권에 속한다.
위임난민은 '유엔 규정에 따라 유엔총회가 국제적 난민보호를 요청한 경우 등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이 난민으로 인정한 자'를 말한다. 정부는 그동안 위임난민 5명을 받아 2명에게 '인도적 지위'만 부여해 체류할 수 있도록 했고,나머지 3명은 출국해 현재는 없는 상태다.
인도적 지위는 난민 요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일정 기간 체류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일반화된 폭력, 외부침략, 국내소요, 대량의 인권침해나 고문 등 비인도적 대우나 처벌 등의 이유로 귀국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법률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법무부 지침으로 시행되는 것이어서 신분이 매우 불안하다.
UNHCR은 국제난민조약 실행을 위해 운영되는 유엔 기구로, 난민들이 새 국적을 획득할 때까지 정치적, 법적 보호를 책임진다. 한국은 2000년부터 UNHCR 집행이사회 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떻게 취재했나= 우리 사회는 갈 곳 없어 찾아온 이방인들을 얼마나 잘 끌어안고 있을까. 국내 난민 실태에 대한 취재는 이런 의문에서 시작됐다. 1992년 국제난민조약에 가입한 지 15년이 지났으나, 정부 정책이나 사회 인식은 국제적 기준에 턱없이 모자르다. 국제적 인권 차원에서 난민 정책과 현실을 점검해볼만 한 시점이다.
우선 국내에서 그들의 삶에 주목했다. 협약에 규정된 대로 난민이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지가 궁금했다. 심층면접과 설문조사를 취재방법으로 사용했다. 심층면접은 이들 대부분이 낮에 일을 했기 때문에 주말 또는 야간에 이뤄졌다. 설문지는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어 등 3개 국어로 제작했다.
법무부와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있을 지 모를 박해를 우려해 난민들의 인적사항을 철저히 비공개하고 있다. 취재팀은 본인이 동의한 경우에만 이름과 나이를 공개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탐사기획팀= 김명호 팀장, 송세영, 유병석, 권기석 기자 tamsa@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