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리 교수 등 사재 털어 청진기 몇개로 시작
각계 후원 늘며 17개과 종합병원 규모로 성장
9만명 무료 진료… "동남아·北서도 활동 계획"



15일 오후2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정문. 진료 번호표를 받기 위해 300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길게 줄을 선 채 자리를 지켰다. 의료 봉사단체인 사회복지법인 라파엘클리닉에서 무료 진료를 받기 위해서다. 진료실은 동성고 대강당 3층이지만 줄은 정문까지 100m넘게 이어졌다.



라파엘클리닉은 종합병원 병동을 방불케 했다. 100평이 넘는 공간 곳곳에 17개 과 진료실이 빼곡히 자리를 잡았고 30여명의 전문의들과 100여명의 의료 봉사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휴일마다 무료 진료를 해주고 임금체불 상담 등 인권보호에 앞장서온 라파엘클리닉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라파엘클리닉은 1997년 4월13일 서울대 의대 가톨릭 교수회와 학생회가 중심이 돼 만든 외국인 노동자 진료 및 구호센터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6시30분 350여명의 외국인 환자들이 진료를 받는다.



지난 10년간 혜택을 입은 외국인 노동자는 9만명이 넘는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약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외국인 노동자들과 불법 체류 탓에 병원에도 가지 못하는 불법 체류자들에게 이곳은 ‘의료 성당’으로 불린다.



가톨릭 학생회 도움과 사재 50만원 털어 첫 진료



라파엘클리닉은 안규리 서울대 의대교수의 제안이 기폭제가 돼 탄생했다. 그는 1997년 파키스탄인 2명이 동료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건을 계기로 외국인 노동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의료봉사 단체인 서울대 가톨릭 학생회 총무였던 안 교수는 이들이 수감된 광주교도소에 면회를 다녀 온 뒤 열악한 의료 환경을 듣고 무료 진료센터를 열기로 결심했다. 여기에 김전 소장(당시 서울대 의대 교수)과 고찬근 신부가 힘을 합쳤다.



출발은 미약했다. 안 교수는 가톨릭 학생회 등의 도움을 받고 자비 50만원을 털어 4월13일 첫 진료를 시작했다. 혜화동 성당 구내 백관동을 빌려 연 진료소는 금세 외국인 노동자들로 넘쳤다. 두 달 뒤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도움을 얻어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성신교정이 리모델링 되면서 1년 만에 다시 지금의 동성고로 옮기며 성장을 거듭했다. 서울대 의대뿐 아니라 고려대와 이화여대 교수들이 참여하고 사회각계의 후원이 이어지면서 청진기 몇 개로 시작한 라파엘클리닉은 10년 만에 종합병원 못지 않은 조직를 갖추게 됐다.



금녀의 땅에서 감시 속 치료도



라파엘클리닉이 성장하기까지 곡절도 많았다. 김전 라파엘클리닉 소장은 아직도 IMF사태를 잊지 못했다. IMF가 닥치자 갑자기 산부인과 진료가 크게 늘어났다. 아이를 가졌지만 직장을 잃은 외국인 여성 노동자들이 대거 몰렸다. 출산관련 의료기구 없었던 라파엘클리닉 측은 강남성모병원 산부인과에 부탁해 산모들을 구해냈다.



안 교수는 두 번째 보금자리였던 가톨릭대 성신교정을 잊지 못한다. 당시 그곳은 금녀(禁女)의 땅이었다. 당시 여자 의사들은 일요일 진료 때마다 사제들의 감시 속에서 진료소까지 가 긴장 속에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또 치과 진료를 위해 동네 미장원 의자를 기증 받아 사용한 것도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한국판 국경없는 의사회 꿈꾼다



안 교수는 10주년을 맞은 라파엘클리닉이 국내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난해 동남아시아를 방문해 현지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의료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절감한 후 국외 활동에도 나서기로 했다. 라파엘클리닉은 이미 라파엘 인터내셔널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고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안 교수는 “동남아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북한에서도 라파엘 클리닉 의료진이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