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 국제분쟁전문기자
얼마 전에 중동지역의 3개국(이란, 시리아, 레바논)을 거의 1개월에 가까운 일정으로 취재차 다녀왔다. 이들 중동국가에서 받은 인상적인 모습 하나를 꼽는다면 뿌리 깊은 반미 정서와는 관련 없이 미국문화가 안방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선호도는 매우 높다. 이란 테헤란이나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비디오 가게 진열대에 놓인 필름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국 영화를 복사한 것들이다.
수요는 공급을 창출한다. 중동지역의 보통사람들 다수가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동도시들 가운데 이스라엘 텔아비브 빼고는 서구적 생활문화가 일상 속에 가장 깊이 자리 잡은 곳이 레바논 베이루트다. 그곳 비디오 가게들도 미국영화로 그득하다. 레바논 베이루트 시내 중심가를 걷다보면 “여기가 중동인가”라는 물음이 절로 나온다. 옷가게나 카페 간판들도 영어로 쓰인 것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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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여인의 한국관
‘Chinese Restaurant'란 간판을 내건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늦은 점심때라선지 손님이 없다. 20대 중반의 여자 종업원이 녹차를 날라다 주며 주문을 받는다. 처음엔 중국인이려니 했더니 필리핀에서 왔단다. 레바논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이 많지만 필리핀 노동자들도 약 3만명에 이른다.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그들은 기독교도 거주지역인 베이루트 동부지역에 몰려 산다.
그녀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되물었다. 서울, 한국이라 했더니 얼굴 표정에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건성으로 주문을 받고는 휙 돌아섰다. 찬바람이 느껴졌다.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먼저 배를 채웠다. 중국차를 한잔 주문하고는 물어봤다. 한국에서 머문 적이 있느냐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경기도 안산의 한 작은 섬유공장에서 1년 가까이 일했다고 대꾸했다. 이른바 ‘산업연수생’ 신분의 이주노동자였다.
그녀는 “임금도 떼였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질 못했다”고 했다. 그녀의 한국 인상기는 한마디로 네가티브였다. 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만, 필리핀 노동자들 사이에서 한국은 ‘결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라’로 꼽힌다고 했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그들의 한국 이미지에 먹칠했을까.
카슈미르와 베트남에서의 만남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말한다면, 한국을 보는 제3세계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눈길은 그리 곱지 못한 듯하다. 지난 2002년 오랜 지구촌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인 카슈미르에 갔을 때다. 택시 운전기사 무하마드 가흐산(27)을 만났다. 그는 “한국 인천과 시흥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늦은 저녁 일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얘길 듣는 순간, 슬며시 불안감이 떠올랐다. 우리 여행객들이 지난날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들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가흐산은 착한 청년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았냐고 묻자 대답하길 꺼렸다.
월남파병 한국군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나트랑에 갔을 때다. 백마부대 주둔지였던 나트랑 해변에서 발마사지 일을 하는 30대 초반의 여인 구에.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한국은 악몽 그 자체였다. 경기도 안양의 한 작은 봉제업체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했으나, 끝내는 아픈 가슴을 안고 돌아왔다. 한국인 사장은 그녀를 집적거렸고, 임금도 제때 주지 않다가 어느 날 부도를 내고는 도망쳤다(베트남 농촌사회는 성에 관한 한 매우 보수적이다).
한국에는 36만(불법체류자까지 합치면 4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다. 그들은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일하기 일쑤다. 힘들고 위험해 우리 한국인들이 외면하는 이른바 3D 업종의 역군들이다. 그런데도 운이 나빠 악덕업주를 만나면 임금을 떼이거나 일하다 몸을 다쳐도 보상은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돌아가는 경우들이 생겨난다.
노동으로 국가신인도 잰다면…
1990년대 후반기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를 맞은 뒤 우리 귀에 자주 들려온 용어가 하나 있다. ‘국가 신인도’ 또는 ‘국가신용등급’이란 용어다. 복잡한 설명을 줄인다면 외국 투자가들이 얼마만큼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느냐를 가리키는 지표다. 결혼패물로 가져온 금을 내놓는 등 온 국민이 힘을 모은 덕에 우리는 비교적 짧은 시일 안에 IMF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국의 국가신인도도 상향 조정됐다. 다행스런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을 해본다. 얼마만큼 안심하고 한국에 투자할 수 있느냐로 국가신인도를 재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의 3D 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안심하고 한국에서 일해도 좋은가를 놓고 국가신인도를 재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올해 초 레바논에서 그리고 예전에 카슈미르와 베트남에서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리면, 한국의 국가신인도가 AAA로 나올지 의심스럽다. 한국에 오는 이주노동자들은 저마다 코리안 드림을 품기 마련이다. 그들이 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면 노동으로 잰 한국의 국가신인도는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 김재명 국제분쟁전문기자
1952년생. <프레시안> 기획위원, 국제분쟁전문기자, 정치학박사(국민대ㆍ성공회대 강사). 서울대 철학과 졸업. 중앙일보 차장, <프레시안> 뉴욕통신원 역임. 저서로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 선인출판사),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국제분쟁전문가의 전선리포트’(2005 지형출판사), ‘20세기 전쟁영화가 남긴 메시지’(2006 프로네시스), ‘석유, 욕망의 샘’(2007 프로네시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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